[#178, 민중신학 다시 읽기] 그리스도의 공동체(로마서 12장 1-8절)(안병무)

2022-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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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강단: 그리스도의 공동체(共同體) (로마서12장1~8절)」, 『현존』 제45호, 현존사, 1973.11, 3-8쪽.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나는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말고 오히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시오.

 

나는 내가 받은 은혜를 힘입어 여러분 각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는 생각을 하시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으나 그 지체들이 다 같은 기능을 맡은 것이 아님과 같이 우리도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 각각 서로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특별히 촛점을 맞추려고 하는 것은 2절에 있는 “적응”(conformation)과 “변혁”(transformation)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 개인이나 교회에 원하시는 뜻이 무엇임을 확실하게 나타내고 있읍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생활은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풍조가 있읍니다. 그러나 적어도 성서에 있어서는 그런 길이 없읍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불렀읍니다. 과거에 너무 개인의 구령이라는 것을 강조해서 모르는 동안에 그런 생각에 젖어 있지만 그런 생각은 오히려 시대적인 상황에 의한 산물이고 성서 전체를 통하여 볼 때에는 공동체 속에 공동체에로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의 부름입니다. 예수께서 설교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의 세계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 자체는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표현으론 종말적인 공동체라고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혼자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신앙생활은 공동체에 있어서만 가능하며, 교회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신앙생활은 명상이나 수도와는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어떻든 나만은 하는 소위 ‘천로역정’적인 태도는 성서에서 말하는 참 신앙의 태도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언제나 사람들의 문제, 곧 너와 나 사이의 문제가 해결될, 또 그것을 중시하고 해결하려고 할 때, 너와 내가 서로 밀고 밀리면서만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우리의 신앙과 구원에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회라는 이름 자체에 너무 매일 필요는 없읍니다. 성서의 엄격한 표현대로 하면 “내 이름으로 두 세사람이 모인 곳에도 내가 함께 하리라”는 말씀이 기본적인 것입니다. 비록 두 세명이 모여도 관계가 없읍니다. 두 세명이 모일 수도 있고, 수천명이 모일 수도 있읍니다. 제도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읍니다. 사실상 교파라는 것도 인간의 약점에 의한 파생물이지 교회의 본질과는 상관이 없읍니다. 이런 뜻에서 교파를 구원의 교두보처럼 내세우는 것은 오히려 기독교의 근본정신을 망각한 일입니다. 교회는 그 외형이 어떤 형태이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르려는 공동체라는 데 그 중요성이 있으며, 바로 이런 전제에서 교회 없이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근래에 교회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크게 일고 있읍니다. 지금 세계의 모든 교회는 대전환기에 처해 어떻게 해야 할지 많은 고민을 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교회의 형태나 지향해야 할 방향은 자명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진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진통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겪을 수 밖에 없으며 그 속에 참여하여 함께 진통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도 “적응”과 “변혁”이라는 두 가지 태도가 말씀되어 있지만 세계의 교회도 이 두 조류로 요약할 수 있읍니다. 즉 하나는 이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보수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보수해야 한다는 것이 교회의 가장 중심적인 본질에 대한 것이 아니고 단지 전의 분위기, 풍속, 구조, 전 대로의 성서해석, 전통에 따라야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보수라고 하기보다는 적응의 태도가 될 것입니다. 교회는 항상 새롭게 개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개혁의 주장 역시 세상이 과학시대요, 메스콤시대요, 경제위주의 시대이니 이에 맞춰 교회도 변형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 그것은 개혁이 아니라 이 세대에 적응하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교회가 이 세대에 적응(순응)하지 않고 자신을 변혁(개혁)할려면 교회가 무엇인가를 재확인해야 합니다. 교회가 무엇인가를 재확인하는 것은 동시에 이 세대가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것과 유리되어 있지 않읍니다. 이에 대해선 로마서 12장의 말씀을 아무런 해석없이 그대로 들어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읍니다.

 

첫째는 5절에 간결하게 표현된대로 교회는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고 각각 서로의 지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이며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이점을 분명히 해야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뗀 조직, 그리스도의 뜻을 뗀 조직, 그리스도를 뺀 관리, 지혜, 그리스도를 뗀 무리…… 이것은 벌써 교회의 번질에서 떠났으며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없는 인간관계, 인간집단은 사실상 냉철하게 비판해 보면 그리스도교회라는 간판 밑에서 영위되는 기만적인 단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우리 자신들을 개혁하려는 생각에 등한합니다.

 

둘째, 교회의 일원, 교회의 지체인 각 사람의 지식, 능력, 모든 소유는 자기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은혜 혹은 성령의 산물임을 철저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는 잘나고 못난 사람이 따로 없으며 또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일반 사회의 공동체와 다른 점입니다. 모두는 똑같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그러나 기능은 다릅니다. 기능의 역할은 높은 자리 낮은 자리가 아니라 성령의 선물, 은혜에서 위탁 받은 역할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말로만이 아니라 몸에 배어서 그렇게 느껴져야 할 것입니다. 내가 받은 모든 것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보다 많이 알고, 보다 많이 갖고 있어도 그것이 나를 교만하게할 요소는 될 수 없읍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자세가 없으면 모르는 동안에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잊게 됩니다. 12장 6절 이하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성ㄹ령의 선물은 각각 다릅니다. 가령 그것이 예언이라면 자기가 받은 믿음의 정도에 합당하게 할 것이요, 그것이 섬기는 일이라면 섬기는 일을 하고,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을 하고,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을 하고, 남에게 주는 사람은 순수한 마음으로 할 것이요, 권위를 가지고 지도를 하는 사람은 성의를 다하여 할 것이요, 구제하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남이 하는 것도 내가 하는 것도 크다 작다에 관계없이 하나님이 저를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점을 재확인해야 합니다.

 

셋째, 교회가 이 세대와 달리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모습을 단적으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고, 박해를 받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이-바로 한 몸 지체는 한 쪽이 아프면 동시에 전체가 아픈 것 같이-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우리가 그의 지체라는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바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했는데 그러면 바울이 말한 이 세대란 어떤 것입니까? 이에 대해선 구체적인 언급이 없지만 바울이 말한 이 세대는 지금과 2000년의 간격을 가졌음에도 분명한 것은 교회의 본질과는 반대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대는 그리스도와는 상관이 없는 세대요 따라서 각기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고 그것에 의해서 계급을 형성하고 자리싸움을 하는 세대입니다. 그러기에 가난한 자, 낮은 자, 약한 자보다는 부한 자, 높은 자, 강한 자에게 더 관심을 쏟는 세대요, 사랑하는 형제가 아니라 서로 싸우고 경쟁하는 사이가 된 세대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서로 마음을 같이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낮은 사람과 같이 하고 자기 지혜를 과시하지 마시오” 한 16절의 말씀은 동시에 이 세대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이제 교회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원하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그 촛점을 모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앞서 자신에게 대한 정직한 물음이 필요합니다. 지금 내가 교회를 향한 마음과 정열이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진심에 의한 것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이러한 성찰이 없으면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 되고 맙니다. 교회는 개혁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엔 그 보다 앞서 자신을 개혁하라는 뜻이 있읍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나 내 뜻과 취미에 맞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상태로는 참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주님의 뜻에 위배되기 때문에 개혁을 해야 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내 형편이나 취미에 맞게 교회를 끌어내릴 수는 없읍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우리는 하나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원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만일 내 힘에 겨우면 나는 못하겠다고 할지언정 교회의 본질을 헤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르는 동안에 자기 변혁의 힘을 약화되고 오히려 이 세대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읍니다. 이것은 벌써 늙었다는 증거입니다. 교회는 자기 만이 아니라 바로 이 세대를 개혁하려는 정열에 불타야 합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에 자기를 순응시키려 함이 아니고 세상을 개혁히기 위함이었읍니다.

 

밀란 마코백은 그의 저서 <무신론자를 위한 예수>에서 과거는 기독교와 맑시즘이 서로 대결하고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분명히 1960년대를 계기로 해서 전환기에 도달했다고 했읍니다. 그는 공산세계에 있는 진지한 맑시스트들은 지금 예수에 대한 정열에 불붙고 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는 그 이유로 혁명기간과 그 후를 구별하고 초기에는 그들에게 새 것이 이제온다는 의식이 강해 정열적일 수 있었는데 이제는 정상화되어 권력구조만 드러나고 세계정세는 원자력이 등장하여 인류 전체를 위협하고 있음에 그들의 관심을 새삼스럽게 “나사렛 예수”에 집중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우리는 이제 성서, 예수에게서 참 많은 것을 배울 수 밖에 없으며 참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야 할 단계에 왔다”고 말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일요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무런 흥미가 없다”고 합니다. 그는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우리의 세대, 우리의 사회로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을 끝끝내 주장할 뿐 아니라 그 신념 밑에서 그 삶을 끝끝내 관철해 나가는 자들이라 정의하고 우리는 그들에게만 큰 관심을 갖는다는 충격적인 표현을 했읍니다. 즉 이 세대에 순응하기 위해 급급한 크리스챤에겐 흥미가 없고 오히려 자기들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은 것에 확고히 선 그들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뜻대로 살려는 자들, 이 무장의 세계에 있어서도 계속 비폭력적인 사랑을 지키고, 소외자들에 대해 정열을 기우리는 자들입니다. 마코백의 말은 한 마디로 “기독교인들이여 자신들의 일에 철저하시오”하는 말로 받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철저함을 보수주의자가 되라는 말로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쓸데 없는 고집과 지엽적인 문제와 외적인 것을 붙들고서 보수적이라고 하며 진실한 기독이라고 하는 데는 염증을 느끼지만, 진실한 복음의 내용이 이 세대에 먹혀들어가지 않으니까 변동을 일으켜야 하겠다는 본질까지 포기하는 그런 순응의 자세는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으면 이 세대에 밀려갈 수 밖에 없읍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겼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교회도 역시 세상에 우뚝 서 복음의 본질로써 계속 자신과 세상을 개혁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 : 심원 안병무 아키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