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민중신학 다시 읽기]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안병무)

2022-02-05
조회수 560


안병무,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청맥』, 1966.

 


 


1. 학문으로서의 신학

 

신학이란 서양에서 어느 학문보다도 오랜 전통을 가졌고 또 천여년 모든 학문을 시종처럼 발 아래 두고 도사려 왔으며, 오늘날까지도 서구 대학에 있어서 적어도 제도상으로 만이라도 제일 학부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으면서도 학으로서 순수화하기 어려운 딜레마에 곧 잘 빠져들고 있다. 그 까닭은 신학이 오랫동안 교권 밑에 사로잡혀 어용학문이 되어 왔던 일과 또 하나는 도그마의 권위 앞에 복종해야 하는 처지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신학의 영역이 '우주적'인 것이 되어 버렸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래로 세밀한 행동규율에서 위로 형이상학에까지 줄달음치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에서 계몽시대를 거쳐 신학이라는 큰 집에서 각 학문이 속속 분가 독립함으로써 철학이 겪고 있는 운명과 비슷하게 실권을 다 빼앗김으로 신학은 이제 와해되어 자취를 감추거나 또는 제 분깃을 고쳐 정비할 수밖에 없었으나, 오랫동안 옛 미련에서 놓여나지 못하여 여전히 허세를 부리려는 통에 오히려 그 학문성을 모호하게 했다.

 

마틴 루터는 신학의 학문으로서의 자유의 문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그는 학으로서의 신학의 자유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로마 교권에 항거해 일어난 것이다. 이 항거의 결과가 과거의 도그마에 대한 항거가 되고 기독교를 고쳐 해석해야 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이끌어 갔으며 그 재해석의 거점은 교회 교권에서 성서에로 옮기게 된 것이다.

 

루터에 의해서 성서는 성서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는 해석학의 원칙이 수립되었다. 그럼으로써 성서와 해석자 사이의 어떠한 권위도 거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해석자를 지배하는 권위는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해석자 자체 안에 숨어 있는 것이며 오히려 이 안에 침입해 들어온 권위가 더 폭군일 수 있다는 것을 보아 넘긴 근세의 신학자들은 성서의 이름 밑에 그 시대사조를 대변했다. 아니 엄격히 말해서 그 시대사조에 노예가 된 자기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결국은 자기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기보다는 자기가 말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경향에 도전해서 들고 일어선 것이 객관주의 입장이다. 그것은 계몽주의의 물결에 몸을 싣고 자연과학자가 사물을 관찰하듯이 성서를 봐야 한다고 보고 거기서 어떤 보편타당한 공식을 발견할 수 있다고 자신했고 그래야만 학문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학이 오랫동안 범한 것 같은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역사학자가 마치 역사를 순수 객관화할 수 있다고 보고 자기가 바로 그 역사의 한 부분으로 속해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객관주관의 도식에서 어떤 결론을 얻으려고 한 것처럼 신학하는 자도 바로 자기가 대상으로 하고 있는 그 속에 자기가 이미 관여되고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바른 파악은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보편적인 진리란 없거니와 있어도 나와 상관이 없으며, 나와 상관이 없는 한 내게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객관화니 보편적인 것이니 할 때에 주관성에서 탈출하고 그 사물 자체를 그대로 파악하려는 의도로서는 옳으나 거기에 큰 잘못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것은 진리란 어떤 고정된 실체라고만 보고 진리란 무엇이냐(Was)라는 형식으로만 추구한 것이다. 물론 사람은 우선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진리가 한 고정된 실체라고 해도 내가 묻기 전에는 끝까지 침묵하는 '무'와 같은 그 실체가 묻는 내가 이해될 때에는 이미 변질되어 실체 자체(ansich)가 아니라 그 실체에 관한 것(über)으로 나와 관련하는 것이다.

 

신학은 Theo, 즉 신을 주제로 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신학은 신 자체를 주제로 할 수 없다. 신학이 비록 신을 문제로 하나 신 자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신에 관한 것(über)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 된다.

 

신에 관한 것이라 함은 결국 인간(역사)과의 관계에서 나타난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신학은 곧 인간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전제에서 신학하는 태도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필요하다. 신학자는 소위 신학자이기 전에 역사가이어야 한다. 그가 우선 마주 선 것은 신이 있다 또는 없다의 문제가 아니고 신이라는 낱말이 있고 그러한 개념과 관련해서 이러한 역사적 현상과 마주선다. 그러한 역사적인 현상의 작품이 바로 성서이며, 이 성서와의 관계에서 기독교의 역사가 형성됐다. 그런고로 신학하는 자의 대상은 무엇보다도 성서다. 이 성서란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할 때 세익스피어나 플라톤이나 논어를 연구할 때나 꼭 같은 역사학의 대상이며 어떤 다른 신적인 딴 방법이나 특권이 허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신학자란 어떤 점에 고전문헌의 연구자와 꼭 같으며 단지 그 대상이 성서와 그 성서로 인해서 되어졌고 지고 있는 역사현상이라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럼 어떤 점에서 신학자이냐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런 물음에 대답해야 한다면 신학자란 성서에서 궁극적인 문제를 찾고 그 문제를 내게 향한 물음으로 받으며 그 물음 앞에 대답해야 할 의무를 느끼며 성서에서 얻은 해답을 엄숙히 받아들일 자세에서 달라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이 있을 수 있다. (1) 왜 하필 성서에서만인가? 그것은 독단이 아닌가? 그리고 (2) 다른 문헌에서는 그런 문제나 거기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우선 밝혀야 할 것은 성서에서 궁극적인 것을 찾으려는 것은 독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서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주어진 것이다(gegebenheit). 그것은 불전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는 불교학자나 사서에 집중하는 유교학자의 경우와 같다. 주어진 것을 시인하는 것은 독단이 아니고 사실상 사람의 '리얼리티'다. 나는 같은 내용의 말이라도 저 사람이 하는 말은 존중하고 싶고 그대로 지나쳐 버리고 싶지 않다. 그것은 반드시 어떤 외적인 권위에 눌려서 맹목적이 된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내가 용납할 수 없는 한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보유하고 있다. 그런고로 오직 아니면 아니고 옳으면 복종하려는 그러한 의미의 관심이다. 이상의 말로써 벌써 그 다음의 물음을 대답했다. 다른 경전 또는 문헌에는 성서에 있는 내용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며 성서가 특히 다른 차원에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신학하는 자는 다른 경전이나 문헌 안에서 제시되는 문제나 해답에 무관심할 수 있으나 성서에서 파악된 것 앞에서는 결단을 해야 할 자기를 발견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러한 신학하는 태도는 오늘날 신학, 그 중에서도 성서학이 지향하고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다.

 


2. 현대 신학이 발견한 것

 

키에르케고르가 나와 신약성서 사이의 이천년사는 '괄호'에 넣어 버리라고 말했다. 그것은 권위로써 군림하는 전통적 해석사에서의 탈출을 선언한 말이며 동시에 성서와 직접 대결해서 성서 자체의 말을 내가 직접 듣겠다는 자세를 말한다. 이러한 주장을 한 그는 어떤 방법론을 제시하지는 못했으나 오늘날의 신학의 방향을 결정한 데 큰 의의가 있다.

 

오늘날 성서신학은 19세기 말엽에서부터 교권적인 신학의 전통을 거부하고 직접 성서와 마주섬으로 과거의 신학이 얼마나 허구한 도그마였는가 하는 것을 밝혔는데,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신학의 반성을 위해서 그 중에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1. 케리그마의 발견

성서는 확대된 '케리그마'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밝혀서 제시한 이들은 슈미트, 디벨리우스 그리고 불트만이다. 저들은 거의 비슷한 때에 피차에 관련없이 한 연구 결과에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성서가 '케리그마'란 뜻은 성서는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 자신의 자기계시 자체가 아니고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에 관한(über) 증언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성서의 내용은 '히스토리'가 아니고 히스토리의 의미를 파악한 역사란 말이다. 성서 기자들은 히스토리에서 발단해서 형성된 신앙고백적인 주제에 초점을 두고 그것을 밝힐 목적으로 히스토리를 재해석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원시기독교들은 예수의 십자가형의 죽음에서 우주적인 의미를 발견했다. 저들은 예수의 죽음을 단순히 한 히스토리로 객관화해서 하나의 추억의 대상으로 끊어버리지 않고 그 주검에서 인간의 비극성과 죽음을 발견하므로 그의 주검에 인간이 참여하고 있다고 자각하고 이 예수의 죽음은 어떤 오해나 인간 악의 결과라고만 보지 않고 거기에는 인간을 죽음에서 구원하려는 한 의지가 있다고 믿고 이 믿음이 죽음에서의 부활이라는 형태로 고백되었으며, 이러한 신념을 밝힌 것이 바로 '케리그마'인 것이다. 저들은 이러한 케리그마로 논증하기 위해서 그러한 입장에서 역사적 예수에 관한 전승을 재해석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지금 전해지고 있는 예수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의 예수는 예수 자체가 아니라 역사적인 예수에 관한 전승과 역사적인 존재로서의 초대 그리스도인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다른 상이다. 즉 역사적 예수가 신앙의 대상 즉 그리스도로 바뀌어진 것이다. 그런고로 성서의 예수상을 전기적으로 이해하고 거기서 직접적인 행동의 규율을 찾으면 예수의 이름 밑에서 딴 폭군을 섬기는 결과가 될 것이다.

 

2. 삶의 자리(Sitz im Leben)

케리그마와 더불어 밝혀진 것은 이 케리그마를 형성한 소위 '삶의 자리'다. 케리그마는 예수를 통해서 주어진 계시에 관한 증언인데 이 증언은 어떤 초월적인 딴 영역에 속한 특수 인간이 한 것이 아니라 바로 삶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들이 한 것이다. 저들은 여러 가지 종교, 문화, 사회적 영향의 제약 밑에 놓인 구체적인 역사적 존대다. 저들은 이 상황 속에 전승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으며 그것으로 생기는 문제들 앞에 서게 되었는데 이것은 바로 삶의 자리다. 이 문제들을 타개해 나가기 위해 저들은 변천되는 이 삶의 자리에서 언제나 주어진 전승의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흔적은 성서의 여러 책에 있는 같은 테마들을 비교 분석하면 곧 드러난다.

 

신약성서에서 중요한 테마는 '예수' 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와 그의 가르침의 중심인 종말론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였는데 성서 안의 각 기자들의 이해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각 기자들 또는 그들이 속해 있던 계열의 '삶의 자리'의 차이에서 온 것이다.

 

성서를 단순히 평면적으로 해석하되 전통적 교권 공식처럼 주어진 교리의 안경을 통해서만 가능하던 전통에 대해서 단순히 항거한 것이 아니라 방법론적으로 새 길을 개척한 것은 19세기 말에 괴팅겐 대학의 젊은 학도들로 시작된 종교사학파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저들은 당대의 거성인 리츨 교수의 문하에 모였던 이들인데 리츨도 전통적인 교리를 대폭 수정하고 나선 신학자이면서도 또다시 자기류의 절대전제를 내세우고 그 안경을 통해서 성서를 이해해야 된다는 데 항거하고 일어선 것이다. 저들은 리츨이 전통적 교리의 비판에서 출발했으나 관철하지 못하고 포물선을 긋는 데 불만하여 그 손의 칼을 뺏어 고지점령에까지 진격하려고 한 것이다. 이 부대의 선봉에 나선 이가 젊은 아이히호른(A. Eichhorm)이며 신학사상 큰 자취를 남긴 브레데(W.Bousset) 등등이었다. '삶의 자리'라는 말을 사용한 이는 그중에 궁켈이다. 저는 특히 구약을 연구해서 창세설화를 비롯한 구약의 내용이 절대로 단일화할 수 없는 다른 종교나 사상에서 들어 온 재료들을 찾아 갈라내고 이러한 잡다한 재료들을 재해석한 그 당시 당시의 삶의 자리를 들추어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저들은 교회가 성서의 영구적인 또는 신적인 것만 말하고 인간적인 역사적인 성격을 도외시함으로 현대인을 곤경에 빠뜨리게 한 것을 비난하고 신학자는 성서의 보편타당한 해석 원리를 주는 것이 그 임무가 아니라 그 내용의 계보를 밝혀 가려내 줌으로써 각 사람이 그 삶의 자리에서 직접 내 것으로 파악하게 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럼으로써 재래의 형식적인 기독교 절대주의를 가로막음과 동시에 기독교의 새로운 이해의 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오늘의 첨단을 걷는 신학자들은 비록 종교사학파에 예속된 것은 아니나 저들의 유산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는 거의 일치하고 있다. 가령 불트만(R. Bultmann)은 신학자는 신학자이기 전에 역사가여야 한다는 것이고, 거기서 얻은 자료를 가지고 비로소 신학자의 임무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성서를 하나의 역사적인 자료로서 철저히 비판 분석한 다음에야 종합적인 작업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종합한다 할 때에 그것은 어떤 공식을 찾아낸다는 말이 아니라 실존적인 결단에 의해서만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학이 걸어야 할 길에 충분한 암시를 얻었다. 그런 것을 생각하기 전에 한국 기독교의 실정을 훑어보자.

 


3. 현대 신학과 한국 교회

 

위에서 현대 신학이 개척한 일면을 말했다. 그 일면은 한국의 교회 내지 신학이 걸어온 길을 반성해 보는 거점으로 삼아보기 위해서다.

 

한국의 기독교는 선교만도 80년이 넘는 역사를 가졌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피선교적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에게 기독교를 소개한 이들 중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미국의 장로교다. 저들이 한국을 선교하려고 했을 때에는 저들 대로의 한국 정세 파악을 하고 거기에 알맞는 선교정책을 수립했다. 우선 양적인 확대를 제일 목표로 하고 전도 내용은 당시 정치경제적인 몰락 과정에 따르는 염세주의에 영합하여 피안적인 도피구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실의의 무리를 흡수하고 빠른 시일 안에 하나의 신흥 세력을 만들어 민족적인 과업에 공헌한 바 없지 않으나 그와 동시에 민족적인 투지를 체념주의로 바꾸어 마비시키고 비현실적이게 한 바도 크다.

 

스스로 자기 상황을 자각한 것이 아니라 남의 손에 의해 설정된 자기 파악 속에서 받아진 기독교란 그 꼴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뻔한 노릇이다. 더욱이 그들이 전해온 기독교 내용은 미국의 일부 보수주의의 계열에 속한 것인데다가 저들대로의 우리 민족 파악에 결부시킴으로 또다시 위축 내지 변질시킨 교리였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 믿으면 복 받고 구원 얻어 천당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리는 이해를 통해서가 아니라 맹목적인 복종이냐 아니냐로 강요되었다. 신학도 이러한 단순한 교리를 대변하는 종으로밖에 될 수 없었다. 더욱이 비참한 일은 선교한 그 나라의 신학의 조류가 이미 변질되었을 때에도 우리에게만은 처음에 주입시킨 그대로를 고수하도록 강요해 왔다는 사실이다.

 

학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치명적인 것은 오늘날까지 많은 수가 고집하는 소위 성서의 축자영감 주장이다. 즉 성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신에 의해서 직접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서를 하나의 '타부'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못을 박아 놓는 한 성서 해석이란 사실상 불가능하고 있다면 암송하는 일 뿐이다. 이것은 유교를 받아들일 때와도 흡사하다. 유학이란 그저 백 번 천 번 사서삼경을 암송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세는 학이 될 수 있는 여부는 고사하고 하나의 유령을 형성하는 일에 불과하게 된다.

 

'축자영감설'은 성서의 권위를 고수하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성서가 지니고 있는 내용을 연구할 자유를 박탈함으로써 사실상 성서를 함구시키고 아전인수의 길을 터놓았을 따름이다. 그 구체적인 실증으로써 꼭 같이 성서의 절대성을 주장하면서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 각기 자기만이 유일한 성서의 수호자라고 주장하고 있는 일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저들에게도 학문이란 있을 수 없었다.

 

이러한 폭군적인 아성이 무너지기 시작한 계기에는 1947년 조선신학교(현 한국신대학교의 김재준 교수를 규탄한 일이다. 김교수는 당시의 세계의 신학사조에 비추어 극히 온건한 성서의 역사비판을 강의에서 시도한 것을 교권자들은 이단으로 규탄한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이미 학으로서의 신학을 체득한 젊은 신학도들이 돌출구를 발견하고 기존세력과 대림하며 학으로서의 신학수립의 첫 주춧돌을 놓았다.

 

그러나 그후 20년인 오늘날까지 신학은 우리 땅에 정착하지 못했다. 우리는 숨돌려 자기 자리를 보살필 겨룰도 없이 서구에서 홍수같이 밀려들어 오는 여러 가지 신학사조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있다. 이 말은 우리는 아직까지 우리가 선 자리에서와 직접 대결해서 내 것으로 하지 못하고 서구 신학자들이 그들의 문제로서 계속적으로 제출하는 테제들에 사로잡혀 그것을 소화하고 대답하기에만 바쁘다.

 

이러한 우리 자세는 아직 신학의 훈련기간이나 배우고 봐야 할 것이 아니냐고 변명한다면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고만 있는 한 신학은 우리의 것으로 정착할 수 없으며 자기의 역사적인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된다.

 

서구 신학자들이 내놓은 테제는 그것이 참된 것인 한 그들의 신학사 내지 정신사와의 관련 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고로 그 어느 하나를 떼어내서 이해될 수도 없거니와 이해했다고 해도 곧 우리의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저들의 문제 설정의 태도와 분석한 채로 제공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우리의 물음이나 대답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신학의 대상인 성서는 어떤 의미로 보나 저들보다는 우리와 더 가까운 셈족을 거쳐서 주어진 것이다. 저들이 셈족에게 주어진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정착시킨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것을 만드는 길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이며 들어서야 할 것이다.

 


4. 우리 신학의 과제


최근에 한국 신학계에서 기독교 토착화라는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 그것은 기독교의 이방성을 극복하고 우리의 것으로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성서 내지 기독교와 우리의 가진 것과의 공통점을 찾아 더듬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것이라고 할 때 우리의 소유로 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것이란 우리를 살리는 것이 되게 한다는 뜻이어야 할 것이다. 나와 너와의 공통점을 발견해서 가지면 나를 살리는 것이 될까? 나와 너와의 공통점만 찾으면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흡수해 버리는 것으로 그칠 것이고, 그런 한 조금도 새로운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가능성은 언제나 나와 다른 것과 마주 선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하는 길도 성서 자체를 냉정히 분석 비판함으로써 그 자체를 밝히는 일과 내가 선 자리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일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성서 자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남이 종합한 결론을 거슬러 올라가서 성서를 파헤쳐 봐야 한다. 이런 작업은 과학적인 방법 외에 아무런 전제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며, 따라서 위에서 말한 종교사학파에서 시작한 역사비평학적 방법을 주저없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 일에는 한계가 없다. 서구나 우리의 구별은 물론 그리스도인이고 아닌 한계도 없다. 그것에 소요되는 지식과 재능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분석해서 얻은 자료를 가지고서야 비로소 자기 것으로 하는 일이 가능한 것이다.

 

자기 것을 만든다는 말은 내가 주체가 되어 해석하는 일이다. 그런데 주체란 말은 단순한 의지가 아니라 역사적인 자각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양의 중세기도 없었고 르네상스도 종교개혁도 프랑스혁명도 또는 산업혁명도 거치지 않았으며, 세계를 정복해 본 일도 부도 있어본 일도 없었다. 그 대신 우리는 중국의 문화권 안에서 그들을 통해서 불교와 유교의 영역 속에서 살아왔다. 그런 것들이 중국의 대세와 더불어 밀려왔기 때문에 주체적으로 재파악할 겨를이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자리'는 반영되지 않고 제도상으로 강압되어 인습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거기서 우리의 삶의 바탕에서 우러나오는 욕구를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샤머니즘이 민중을 지배했으되 밖에서 들어온 사상과 어떠한 대결도 없이 병행되어 왔다. 정치적인 여건이 어떻게 돼 왔으며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현금은 모든 것이 전근대적 퇴폐상태에 있는데 일부층에서는 서구적인 감각의 첨단을 걸으려고 한다. 그 사이에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젊은이는 '반항'을 말하나 무엇에 반항할지 분명치 않다. 그것은 우리에게 반항할 만한 뚜렷한 아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엇을 찾는 일을 체념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물어야 하고 대답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참으로 물어야 할 것을 묻지 못한 채, 얻어야 할 대답을 받지 못한 채,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오늘날에 이르렀다.

 

신학도 결국 우리의 물음을 성서에서 찾아 밝혀주고 우리가 얻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 대답을 찾는 일이 아니면 우리와 상관없는 학문일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우리는 서구 신학자들이 내놓은 '테제'에만 사로잡혀서 바르트, 브룬너, 니이버, 불트만, 폴 틸리히로 뛰더니 요새는 몇몇 미국의 학자들이 내던진 '신 죽음의 신학'이라는 테제를 내놓자 한국의 신학자들은 그 처리에 법석해야 했다. 이미 말한 대로 이런 일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그러나 신학이 우리의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내가 선 자리에 내가 지닌 물음과 내가 꼭 들어야 할 대답에 귀를 모을 때 시작될 것이다.

 

출처 : 심원 안병무 아키브